- “아직도 바둑돌 잡으면 떨리지만… 女기사 첫 1000승 목표”[M 인터뷰]
- 출처:문화일보|2023-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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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 인터뷰 - 바둑여제 최정 9단
작년 男·女 통합 메이저 결승
여류 기사로는 최초로 700승
내달 세계 랭킹 ‘톱 10’ 유력
명실상부한 세계 여바둑 1위
“최초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도장깨기’ 같아 재미있어요”
“작년 갑자기 찾아온 슬럼프
명상으로 마음 다스려 극복
2년 만의 ‘집밥’ 한 몫 했죠”
최정(27) 9단은 세계여자바둑계의 1인자다. 최 9단이 걸어온 길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최 9단은 남녀 통합 메이저대회에서 세계 최초로 결승에 진출했고, 최근엔 여자 최초로 700승을 챙겼다. 다음 달 발표되는 랭킹에서는 여자 최초의 ‘톱 10’ 진입이 유력하다. 최 9단은 지난해 12월 열린 2022 바둑대상시상식에선 여자 기사상과 여자 승률, 여자 연승, 인기 기사상을 수상하며 4관왕에 등극했다.
최 9단에 붙은 별명도 화려하다. ‘바둑 여제’는 최 9단에게 가장 어울리는 별칭. 화려한 경력을 가진 남자기사들이 그를 기피하는 건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니다. 지난 7일 한국기원에서 만난 최 9단은 “최초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도장 깨기 같아 너무 재미있다. 뿌듯하고 자부심도 느낀다. 그래도 요즘엔 자만하지 않도록, 너무 들뜨지 않게 조절하려고 한다”고 미소를 지었다.
최 9단은 지난해 11월 ‘금녀(禁女)의 벽’을 무너뜨렸다. 2022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4강전에서 변상일 9단을 꺾고 여자 바둑기사 최초로 세계대회 결승에 올랐다. 종전 여자기사의 메이저대회 최고 성적은 루이나이웨이(芮乃偉·중국) 9단이 30년 전인 1992년에 달성한 4강이었다. 최 9단은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루이 9단을 넘어 새 역사를 써냈다. 비록 결승에서 세계 최강인 신진서 9단에게 패했지만, 최 9단의 놀라운 선전에 세계바둑계의 극찬이 쏟아졌다.
“16강전이 고비였다. 상대는 일본 최고타이틀(기성) 보유자 이치리키 료(一力遼) 9단이었는데, 말도 안 되게 이겼다. ‘이것만 걸려라’ 하고 있었는데, 딱 걸렸다. 그 판을 이기고 나서 자신감이 커졌다. 이후 결승까지 올라갔는데, 마치 우승한 것처럼 축하를 받았다. 그래도 부담은 크게 없었다. 상대가 신진서 9단이라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했다. 여자 최초로 메이저대회 결승 진출이라는 것에 만족했다. 2021년 예선에서 떨어졌는데, 지난해엔 결승까지 갔다. 그래서 더 기뻤다.”
사실 삼성화재배는 최 9단이 가장 애착하는 대회다. 대회 개최 장소의 기막힌 밥맛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10년 전부터 삼성화재배에 꽂혔다. 대회가 열리는 유성연수원은 밥이 엄청 맛있었는데, 거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탕웨이싱(唐韋星·중국) 9단은 식사를 세 판이나 먹는다. 10년 전부터 꽂혔던 좋은 밥을 먹고 좋은 기운을 받았는데, 그때부터 삼성화재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회가 됐다. 지난해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온라인으로 열린 것이 너무 아쉽다.”
이젠 여자바둑계에서 ‘적수가 없다’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최 9단이 지난해 챙긴 상금은 무려 4억 원에 이른다. 2018년 여자기사 최초로 상금 3억 원 시대를 열었던 최 9단은 이제 상금 규모를 4억 원까지 늘렸다. 상금 규모는 남자기사들 사이에서도 최상위권이다. “돈 관리는 부모님이 해 주신다. 사실 돈 쓸데가 많지 않다. 4억 원이라는 돈이 막 체감되지는 않는다. 부모님께서 잘 관리해 주시고 있다. 용돈을 받아 쓰는데, 액수가 딱 정해져 있지 않고 필요하면 말씀을 드리고 받는다. 신경 쓰는 것보다 이게 편하긴 하다.”
여자 랭킹에선 111개월째 1위 자리를 고수 중이다. 주변에서 “진짜 아주 징글징글하다”라는 말도 나오는 이유. 한국기원 관계자는 “2위 그룹과 격차가 너무 커 향후 몇 년 안엔 뒤집기가 쉽지 않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승부의 세계에서 늘 이길 수만은 없는 법이다. 최 9단은 지난해 상반기 갑자기 슬럼프에 빠졌다. 그는 “지난해 10월 호반배를 앞두고 ‘이제는 안 되겠다’ ‘이러다 큰일 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패턴이 너무 굳어져 있었고, 변화가 필요했다. 장점이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엔 너무 힘들었다”고 기억했다. 최 9단은 패배를 곱씹으면서, 발전을 꾀했다. 절치부심하며 바둑 공부에 매진했다. 최 9단은 “이후 호반배에서 내가 두는 수에 다시 자신감이 생겼다. 아마 힘들었던 그때를 잘 이겨 낸 것이 삼성화재배에서 좋은 성적으로 이어진 것 같다. 내가 성숙해지는 계기였다”고 설명했다.
최 9단이 슬럼프를 이겨낸 원동력엔 든든한 ‘집밥’도 한몫했다. 2020년 5월 부모님을 떠나 독립했던 최 9단은 상반기 일정을 마치고, 약 2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최 9단은 “집에서 나와 자취생활에 익숙해졌지만, 혼자 살면서 신경 쓰이는 게 많았다. 지난해 하반기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고, 맛있는 집밥으로 마음에 안정이 생겼다. 살림하는 엄마가 대단하다. 워킹맘이신데 너무 신경을 써 주셔서 감사했다. 집에 돌아오니 너무 좋았다. 이젠 자취생활에 미련은 없다. 요즘엔 방 정리도 잘한다. 방 정리로 스트레스를 풀 때도 있다”고 웃었다.
최 9단은 ‘세계 최강의 공격수’로 불린 유창혁 9단의 제자다. 유 9단의 제자답게 최 9단은 수읽기가 빠르고, 시원시원하며 힘이 좋은 바둑을 구사한다. ‘소녀 장사’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 여기에 타고난 승부사다. 특히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계속 성장을 하는 밑거름이 됐다. 그래서 최 9단은 대회보단 상대에 집중한다. 최 9단은 “지는 걸 정말 못 참는 성격이다.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고, 지금도 상위 랭킹에 있는 선수들에게 지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다. 그래서 대회의 중요도보다 상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꼭 이기고 싶은 판은 전력을 다해 이기는 게 목표다. 만약 이기고 싶었던 상대에게 지면, 그 내상이 오래가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최 9단의 강심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지난해 삼성화재배의 8강전이었다. 최 9단은 중국의 양딩신(楊鼎新) 9단을 만났다. 당시 모두의 예상은 세계대회 우승 타이틀을 달고 있던 양 9단의 우세를 예상했다. 그러나 최 9단은 주눅 들지 않았다. 주변에서 ‘상대가 쉽지 않다’ ‘불리하다’는 말이 나올 때면, 오히려 웃으며 “그냥 두는 거죠. 자신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최 9단은 “상대가 워낙 강자였다. 신진서 9단도 까다로워하는 기사다. 그래서 제게 기대를 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이기고 싶었다. 바둑을 두면서 그렇게 이기고 싶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대국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대국 내내 잡생각이 유혹의 손길을 뻗고, ‘깜빡’하는 사이 정신적인 컨디션이 무너질 수 있다. 긴장의 끈을 잠시나마 놓치면, 실수가 나오기 마련. 최 9단은 명상으로 마음을 다스린다. 명상은 승부, 슬럼프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털어버리는 데 도움이 된다. “머리를 비우는 게 중요한데, 명상으로 머리를 맑게 한다. 전문적으로 배운 것은 아니지만, 유튜브 등을 통해 따라 하고 있다. 쓸데없는 생각이 들면 명상을 하는데, 명상하고 나면 마음의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다.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명상으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몸은 가벼워진 것 같다. 효과가 꽤 좋다.”
최 9단의 시선은 1000승, 그리고 오는 9월 열리는 항저우아시안게임으로 향하고 있다. 국내 바둑에서 1000승 이상을 따낸 기사는 모두 15명. 최다승은 조훈현의 1959승. 700승을 챙기는 동안 최 9단의 승률은 70%. 700승을 거두는 동안 25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최 9단은 남자기사와의 승부에서도 230승 211패(승률 52.15%)로 절반 이상 이겼다.
게다가 여자기사는 대국 수에서 여자대회가 따로 있어 유리하다. 바둑에서 쉬운 승리는 없다고 하지만 최 9단의 1000승은 떼어 놓은 당상이다. 최 9단은 “여자기사 최다승 기록에 만족하지 않는다. 여자기사 최초 1000승을 달성해 보겠다”고 다짐했다. 최 9단은 항저우아시안게임 대표팀에 선발됐다. 국제종합대회에서 태극마크를 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 9단은 “세계대회는 반드시 잘하고 싶다. 다가올 아시안게임에서 꼭 메달을 따고 싶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차근차근 실력을 쌓으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고 각오를 다졌다.
입신(入神)의 경지에 올랐지만, 최 9단은 자신의 실력을 칭찬하면 손사래부터 친다. “아직도 바둑돌을 잡고 떨릴 때가 많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기에 더욱 그런 것 같다. 바둑은 끝이 없는 영역이기에 두면 둘수록 어렵다. 그래도 복잡한 문제에 집중해서 내 힘으로 풀어나가는 게 즐겁고, 바둑으로 승부를 겨루는 건 여전히 재미있다. 지난해 거둔 성적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발전하는 최정을 보여주고 싶다.”
■ ‘뚜벅이’ 최 9단
“운전은 신경 쓸 일이 많아 집중에 방해”… 프로기사 대부분이 ‘뚜벅이’
최정 9단은 ‘뚜벅이’다.
현재 경기 성남시 분당구에 사는 최 9단은 서울 성동구에 있는 한국기원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한다. 집에서 한국기원까지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이 훌쩍 넘는다. 때론 부모님이 직접 한국기원으로 출퇴근을 돕는다. 매년 억대의 두둑한 상금을 챙기는 최 9단이지만, 그는 운전대를 잡은 적이 없다.
최 9단이 대중교통을 고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오롯이 바둑에만 집중하고 싶기 때문이다. 최 9단은 “운전을 하면 신경이 많이 쓰인다. 차선을 변경해야 하고, 여러 돌발 상황에도 대처해야 한다. 운전은 힘들고,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운전은 손해라고 생각해 운전대를 잡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비단 최 9단뿐 아니다. 남자기사들도 운전대를 잡지 않는다.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 신진서, 박정환 등 한국 바둑을 대표하는 남자 바둑기사들도 운전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대국 승부가 많은 기사는 거의 운전을 하지 않는다. 국내에서 이름이 꽤 잘 알려진 기사들은 대부분 그렇다”고 귀띔했다.
운전과 관련한 에피소드도 많다. 이창호 9단은 지난 2003년 1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열린 도요타 덴소배 초대 챔피언에 등극하며 부상으로 약 1억 원 상당의 고급 승용차를 받았다. 하지만 운전을 못 하는 이 9단에게 반갑지 않은 부상이었다. 결국 이 차는 집 한쪽에 고이 모셔만 뒀다는 후문이다.
대국장으로 이동하는 방법도 천차만별이다. 이세돌 9단은 택시를 고집하며, 이창호 9단은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한국기원을 찾는다. 신진서 9단은 집이 가까워 걸어서 출퇴근한다.
최 9단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바둑에만 집중할 수 있다. 바둑은 조금의 차이가 승부를 바꾼다. 한 수 한 수가 중요한 게 바로 바둑이다. 바둑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는 건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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